바울과 바나바의 다툼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행 15:36-41)


신약성경의 절반을 기록한 대 사도 바울과 자기 소유를 팔아 사도들 앞에 주어 궁핍한 성도들을 위해 쓰게 했던 헌신적인 바나바가 다툰 것도 문제인데, 화해하지 못하고 갈라섰다는 것은 초대교회의 큰 오점으로 남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들어난 모습만 보고 성급히 판단하는 것은 바나바와 바울을 오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는 것이니 섣부른 결론을 내선 안 될 것입니다. 다툰 두 사람과 다툼의 요인이 된 마가가 어떤 사람인지를 추적하다 보면 이 싸움이 얼마나 중요한 싸움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아 세 사람을 알아보고 결론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1. 바나바


1) 위로와 권면의 사람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행 4:32-37)


초대교회의 유무상통(有無相通)하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당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면 유대교에서 출교(黜敎)당하고 유대사회로부터 배척당해 당장 생계를 걱정하게 되는데, 이런 분들을 위해 재물이 있는 사람은 그 재물을 팔아 사도들 앞에 내놓았던 것인데, 그 첫 사례가 바나바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는 레위지파 사람으로 본명은 요셉인데, 사도들이 그의 삶을 보고 바나바라는 이름을 준 것 같은데 위로와 권면의 사람이란 뜻입니다. 바나바는 이웃의 아픔과 필요를 알고 자기 소유를 내준 헌신적인 사람입니다. 바나바가 직접 나눠주지 않고 사도들 앞에 둔 것은 도움을 받은 사람이 자기를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한 것이겠지요.


2) 화목하게 하는 사람, 사람을 세워주는 사람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행 9:26-27)


사울이 다메섹에서 회심한 후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사귀려고 하지만, 교회를 핍박하는 데 앞장섰던 사울의 회심을 믿지 못해서 아무도 만나주지 않을 때, 바나바가 사울을 데리고 제자들에게 가서 사울의 회심과 그의 변화된 삶을 적극 소개하여 화해하고 교제의 악수를 나누게 해줍니다. 성경이 언급하지 않아 확실치는 않지만 바나바와 사울이 구면이거나 친한 사이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바나바가 사울의 대변자가 되었을까요?


사울이 회심하여 주님의 제자이고 일군이 되었으니 예루살렘 교회에 와서 그 동안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일과 교회를 핍박한 일을 사죄하고 주님의 부름 받았음을 알리려고 제자들을 찾은 것 같은 데 아무도 그를 만나주지 않았겠지요.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바나바가 사울을 찾아가서 그동안 회심하기까지의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듣고, 그의 회심을 믿어주고 사도들을 설득하여 사울과의 만남을 주선하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 교회 안에는 스데반의 가족들도, 또 사울로 인해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가족과 친지도 있어 사울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분위기도 있었겠지만, 그런데 구애받지 않고 개심한 사울을 받아들이는 일에 적극 나서는 것을 보건대 바나바는 사람을 세워주고 화목하게 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행 11:19-24)


스데반의 순교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주님의 말씀의 성취입니다. 예루살렘에만 있던 교회가 스데반의 순교와 사울의 핍박으로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방 지역까지 흩어지면서 복음의 말씀을 전하지만 오로지 유대인에게만 전할 뿐입니다. 바나바가 어떻게 안디옥 교회에 파송되었는지는 바나바를 아는데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여기를 알려면 당시 교회의 분위기를 알아야 하는데, 사마리아 교회에 두 사도가 파송된 배경을 알면 도움이 될 것 같아 짚어 봅니다.


* 사마리아 교회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행 8:14-17)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거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촌에서 복음을 전하니라(행 8:25)


빌립이 전도하여 사마리아도 복음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하고 두 사도가 안수하니 성령을 받습니다. 빌립 집사가 큰 이적을 행하면서 전하는 복음을 받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면서도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되는 대목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영접한 순간 이미 성령을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다만 성령의 은사 즉 방언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등의 외적인 증상이 나타나지 않다가 두 사도의 안수로 나타났다고 보면 좋을 듯싶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났을까요? 빌립이 집사이고 베드로와 요한은 기둥 같은 사도이기 때문일까요? 절대로 그럴 리가 없는데 왜 사도들이 안수했을 때에 성령을 받았을까요? 빌립도 두 사도처럼 앉은뱅이도 일으켰고 귀신도 쫓아냈으니 직분 외에는 차이가 없는데도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났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초대교회의 고민을 이해하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의식이 대단하여 이방인과의 교제가 금지되어 있어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갔었던 일로 비난을 받을 정도입니다. 이 잘못된 의식을 깨려고 베드로를 고넬료에게 보내면서 환상을 보게 하고 고넬료에게 천사가 나타나 베드로를 초빙하게 하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할 때에 성령이 임하는 것을 눈으로 보게 하여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분명히 해둔 것입니다. 이 일에 베드로를 사용하신 것도 논란의 여지를 없애기 위한 조치임이 분명합니다.


사마리아는 이방 취급을 받아왔고 예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눅17:18)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충격적인 사건이라서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이 그 진위를 확인하려고 기둥 같은 베드로와 요한을 보냈던 것이고, 두 사도는 사마리아에 오면서는 복음을 전하지 않다가 사마리아에도 성령을 부어주심을 확인한 후에야 돌아가면서 사마리아 여러 마을에 복음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는 이유는 안디옥 교회에 왜 바나바가 파송되었을까를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나바는 헌신적인 믿음의 사람이지만 유능한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일곱 집사를 뽑을 때에 그의 이름이 빠졌고, 선교 여행에서도 그의 활약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을 보아 그렇게 짐작해 보는 것입니다. 그런 바나바가 어쩌다 안디옥교회에 파송이 되었을까요? 안디옥교회는 이방인들의 첫 교회입니다. 예루살렘에서는 그들을 돌 볼 인도자를 파송할 필요를 느꼈지만 이방인 교회로 가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고민하던 차에, ‘정히 갈 사람이 없다면 내가 가겠다’고 바나바가 자원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바나바는 도움이 필요한 것이면 어디라도 가는 진정 자기가 부인된 사람인 것 같고 그래서 바나바를 착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4) 기꺼이 동역하는 사람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5)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 와서 그들을 인도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옵니다. 많은 사람들을 인도하는데 한계를 느낀 바나바는 이들을 양육하기 위해 낙향해 있는 사울을 찾아가서 그를 설득하여 함께 안디옥 교회를 일년간 가르쳤고, 이 이방인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이 생겨났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호칭이 ‘예수쟁이’처럼 조롱의 의미라고 하지만 그럴 리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인이 빛을 비추면 사람들이 칭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말씀하셨고, 이미 예루살렘 교회가 백성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개독교’라 불리는 것은 우리가 빛을 잃었고 맛 잃은 소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는 안디옥 교인들을 교육하기 위해 좋은 선생을 초빙하여 교인들을 성장시켰고 그래서 그들이 참 그리스도인이 되어 칭송을 받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게 된 것이지요. 게다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바나바의 모습을 보면서 그를 본받았을 것이니 어찌 백성의 칭송을 받지 않았겠습니까?



2. 바울


1) 가장 악질적인 교회 핍박자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행 7:54-8:1)


바울은 사울일 때에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책임을 떠안은 주동자였습니다. 예수께서 부르실 때까지 죽이고 옥에 가두고 학대한 사람이 부지기수(不知其數)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스데반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겼다고 할 정도로 악독한 사람 같습니다.


2)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사람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뒤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 26:14)


바울 사도는 스데반을 죽인 후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날 때까지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잡아 옥에 가두고 강제로 주를 훼방하는 말을 하게하는 등 악랄하기 짝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기독교인들을 잡으려고 갈 때, 빛으로 나타나신 주께서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하시면서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는 말씀을 더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소나 말에게 수레를 끌게 하는데, 성깔이 있어 뒷발질을 하는 놈들이 있습니다. 주인은 그 버릇을 고치려고 뒷발 가까이에 굵은 나무나 가시채를 가로질러 놓습니다. 이것이 걸을 때에는 닿지 않아 문제가 없지만 뛰거나 뒷발질을 하게 되면 뒷발에 닿아 고통을 줍니다. 처음에는 그것을 차서 없애보려고 해보지만 차면 찰수록 더 세게 뒷발을 때리기 때문에 고통이 가중됩니다. 그래서 뒷발질하던 서나 말도 결국에는 포기하고 온순해지게 하는 것이 가시채입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행 22:3-4)


사도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이 주님의 눈에는 소나 말이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 무모한 짓을 이제 그치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바울이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선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는 이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 특별했던 사울은 이런 이단들이 더 번지지 못하도록 기독교인들을 핍박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를 괴롭히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이단들의 태도입니다. 스데반의 말과 그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입니다. 이단이면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향해 이를 갈거나 공포에 떨며 살려달라고 애걸하여야 정상인데 이 이단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들의 전혀 예상치 못한 태도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를 돌로 쳐 죽이는 사람들을 보고 “이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마소서”하는 말과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하면서 천사 같은 얼굴로 죽는 모습이 무언가 있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진위를 알기 보다는 이런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더 극성스럽게 이방나라까지 가서 기독교를 말살시키려는 행위가 마치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것과 같다는 지적인 것 같습니다.


3) 생각을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일 중심의 사람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쌔,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행 9:18-20)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행 9:28-30)


“나는 네게 핍박하는 예수”라는 주님의 말씀에 큰 충격을 받은 사울은 삼일간 식음을 전폐합니다.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아나니아가 안수하여 눈을 뜬 사울은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린 후에 즉시 자기가 핍박하고 잔해하던 그 복음을 전합니다. 그는 본래 성경에 능통한 사람입니다. 주님을 만난 후 이미 알고 있던 사실과 성경이 일치됨을 확인한 그는 온 몸을 던져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력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죽이려는 음모를 피해 바구니를 타고 내려와 피신하였으면서도 예루살렘에 오자마자 또 복음을 전하는 극성스러운 일 중심의 사람인 것입니다.



3. 마가


1) 유약한 부잣집 홀어머니의 외아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막 14:50-52)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행 12:12)


예수께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드신 후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셨다가 거기서 잡히십니다. 그때 제자들이 다 흩어져 도망하고 웬 청년이 베 홑이불을 두르고 따라나섰다가 예수를 잡은 사람들에게 잡히자 그 홑이불을 벗어버리고 벌거벗은 몸으로 도망칩니다. 그런데 이 기록이 마가복음에만 있기 때문에 이 최초 스트리킹의 주인공이 마가 본인의 고백으로 보고 있습니다. 마가의 집에 120문도가 기도하다가 오순절 성령세례를 받는데, 그 정도의 사람들이 거할 수 있는 큰 집의 소유주라면 부자라고 할 수 있고, 어머니 마리아는 나오는데 아버지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아버지를 일찍 사별하지 않았나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가는 부잣집의 아들로 믿음 좋은 홀어머니 밑에서 고생을 모르고 자라서 믿음이 있고 마음이 순전하지만 유약한 청년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2) 제 1차 선교여행에 동참한 마가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행 12:25)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행 13:13)


바나바는 예루살렘에 갔다가 조카 마가를 데려옵니다. 아마 마가는 작은 아버지의 선교사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사모하는 마음에 따라나섰던 것 같고, 제 1차 선교 여행을 떠날 때에도 동참하기를 원해 일행에 합류하였던 것 같습니다. 선교지에서의 생활 자체도 어려움이 적지 않은데 낯선 땅을 선교 차 여행하는 일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더구나 유대인들은 정결한 짐승 즉 소와 양고기 외에는 돼지고기를 먹을 수 없고, 물고기도 비늘과 지느러미가 없는 것은 먹을 수 없어 음식 때문에 많은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고, 게다가 마가는 고생을 모르고 자란 유약한 사람이라 그 고생을 견디기가 여간 어렵지가 않았을 것입니다. 마가는 주를 사모하는 마음은 간절하지만 처음 겪는 험난한 여행을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서 안디옥으로 돌아갔던 것 같습니다.



4. 믿음의 선한 싸움


1) 싸움의 동기 : 하나님 때문에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행 15:36-41)


그런데 제 2차 선교 여행을 떠나면서 마가를 데려가자는 바나바의 제안을 바울이 거부하면서 심히 다퉜고 합의점을 찾지 못한 두 사람은 마침내 갈라져서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 섬으로, 바울은 실라와 함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교회의 전송을 받으며 떠납니다. 두 사람 모두 철저히 자기 부인이 된 사람이며 주님과 성도를 위해서라면 생명까지 기꺼이 던질 수 있는 성숙한 일군이며 이제 그 이름도 사도로 불리우면서 어쩌다 이만한 일에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갈라져야만 했을까요?


바울이 마가를 데려갈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일’ 때문입니다. 선교여행은 성령이 시켜서 시작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힘들다고 중간에 그만두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의 사기에 얼마나 타격이 되겠습니까? 그런 전력이 있는 마가를 데려다가 무엇에 쓰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전혀 도움이 안 되니 데려갈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생각은 다릅니다. 바울의 말처럼 마가 때문에 하나님의 일에 지장이 있었던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마가를 내친다면 마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에게도 자신의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주어야 하나님의 일군으로 성장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마가가 조카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지요. 그는 하나님 때문에 마가에게 기회를 줘서 하나님이 쓰실 만한 그릇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2) 일 중심의 사람 바울, 사람 중심의 사람 바나바

바울이 일 중심의 사람이라면 바나바는 사람 중심의 사람입니다. 이 싸움은 누구도 양보할 수없는 헤어질 수밖에 없는 하나님을 위한 싸움입니다. 바울이 양보하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고, 바나바가 양보하면 하나님의 사람을 양육해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펴보았지만, 바나바가 아니면 사울은 사도들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고, 또 바나바가 데려다가 안디옥 교회에서 함께 사역하지 않았다면 언제까지 고향 다소에 칩거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제외한다면, 바나바가 아니면 오늘의 바울이 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마가도 바나바의 보살핌으로 마침내 초대교회의 기둥 같은 일군이 되었습니다. 누구의 공로입니까? 물론 바나바의 공로이지요. 그러나 마가는 바나바와 바울의 합작입니다. 마가는 바나바의 보살핌과 바울의 채찍으로 만들어졌다고 봅니다. 마가처럼 유약한 사람은 바나바의 보살핌만으로는 자기 한계를 극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마가는 바울의 책망을 떠올리고 분연히 일어섰을 것이며, 후배에게 수모를 당하면서도 끝까지 자기를 버리지 않은 바나바를 실망시킬 수 없어 죽기 살기로 역경을 견뎌 마침내 마가로 거듭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는 바나바와 바울의 합작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3) 일군 마가를 부르는 바울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골 4:10)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 4:11)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몬 1:24)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벧전 5:13)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고전 9:6)


마침내 마가도 하나님의 일군이 되었습니다. 마가는 바울과 함께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바울은 마가를 나의 일에 유익하니 데려오라고 하고 나의 동역자라고 합니다. 마가가 일군으로 성장하자 바울은 서슴없이 그를 부릅니다.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버렸고, 이제 하나님의 일에 쓸모가 있기 때문에 부르는 것이지요. 바울은 하나님의 일에 미친 사람이고 그 일 때문에 사람을 버리기도 하고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마가 역시 자기를 내쳤던 바울을 외면하지 않고 그의 부름에 기꺼이 응하여 돕고 섬깁니다. 마가의 됨됨이를 알아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기능을 갖췄다고 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되어야 제바로 된 것입니다. 마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고 일할 기능도 갖췄기에 하나님의 일군이 되었고, 바울이 그를 동역자라고 하는 것이지요.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고 갈라섰지만 각기 자기 사역 대문에 헤어진 것이지 감정 때문이 아님을 날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이후에도 함께 사역을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나바와 바울, 마가 이 세 사람 어느 누구도 ‘나’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싸울 수도 갈라설 수도 다시 만날 수도 일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부인되면 이렇게 자유로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맺으며


- 바나바 사역 유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 바나바는 보조자가 아닌 지도자

한동안 ‘바나바 사역’이라는 교육이 유행했는데, 그 바나바 사역이라는 것이 목회를 돕는 보조자의 역할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큰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교육하기 위하여 주셨는데, 그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는 것’이고, 그 만들어진 사람으로 선한 일 즉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는 일엔 관심이 없이 오직 일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것 같은데, 이는 큰 오류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지 못하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마가를 내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나바가 필요합니다. 바나바처럼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어내는 사역이 있어야 바울이 일군을 공급받아 마음껏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가는 바나바와 함께 일을 하였지만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바나바에게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한 일 즉 훈련을 받는 것이고, 거기를 졸업하면 바울에게 와서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 하나님의 사람이 되지 못하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어

고아원과 양로원 장애자를 보살피는 일을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합니다. 그러나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 사역을 빙자하여 자기 욕심을 채우는 분들이 적지 않은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지 못한 채 ‘하나님의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이 마가처럼 하나님의 일을 사모하여 순수한 동기로 시작을 하지만, 일이 커졌을 때, 그 일을 감당할 만큼 사람이 커지지 못해서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지 못해서 하나님의 일을 망치는 것입니다. 이는 어린 아이가 칼에 다칠까봐 자란 후에 칼을 줘야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지 못한 채 하나님의 일을 하기 때문에 교회가 늘 문제에 휩싸여 있는 것임을 깨닫고, 이제 사람을 길러내는 바나바 사역에 힘을 쏟았으면 하는 바램 간절합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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