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언어와 교회의 건강성


살아가며 점점 더 느끼는 것은 바로 말의 중요성이다.

결국은 말로써 한 사람의 평가가 이루어지고 말로써 그 사람의 장래도 결정된다.

아무리 대단해 보이는 사람도 말이 경박하면 바로 격하된다.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는 이라도 말하는 게 천박하면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결국 상대방을 평가하고 점수를 매긴다. 어떤 기준인가?

그의 말하는 것을 보고 한다. 그의 말의 습관, 말하는 자세, 그가 쓰는 언어들은 그가 여하한 사람인가를 대변한다.

더구나 이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숨어있을 존재가 아니다. 비신자들과 섞여 살아야 한다.

주님은 우리더러 빛이 되라고 하신다(마 5:16).

바울은 각처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여야 한다고 알려준다(고후 2:15).그래서 말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경고하신다.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 12 : 36)

성경에는 말에 대한 경고가 수없이 많다. 말로 덕을 끼칠 것을 강력하게 권면한다.

그런데 성경에서 주로 언급하는 말의 문제, 언어의 문제는 그 내용과 관련되어 있다.

그 말의 가치 여부는 화자의 내면과 관련되어 있다.

주님은 위선자는 위선적인 말을 하고 악한 사람은 그 속에서 악한 말을 낸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랑이 동기가 되는 말은 좋은 말이요, 진실이 원인인 말은 가치 있는 말이다.

즉 성경은 일반적으로 말의 내용과 그 말을 하는 자의 내면을 지적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언어의 내면적 가치보다는 용어의 외적인 바른 사용을 권장한다.

그래서언어는 말보다는 용어라는 말이 더 적합하리라 본다.

교회의 용어들에 대해서는 생각할 것이 많다.

예수님의 존함으로(이의용 지음 / 리컴)라는 책을 읽다보니 두려워졌다.

나도 무심결에 무슨 잘못을 범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냥 사용하고 있지만 부적절한 용어를 쓰고 있지는 않은가?


▲ 습관적인 용어들= 사실 무지함으로 쓰는 잘못 쓰는 용어들도 있다. 혹은 그냥 습관적으로 쓰는 것들이 있다.

가만히 드려다 보면서 바꿔야 할 것들이 많다고 느껴왔다. 그러나 누구도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한다는 필요성은 공감하지만 누구도 선뜻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교회도 예부터 상례로 그리 사용하는 말들이 있다(예: 새벽 제단, 가정제단…).

한 교회의 건강성, 한 교회의 내적인 분위기는 그 교회가 상례로 쓰는 언어와 상당히 밀접하다.

한 단체가 그 안에서 통용하는 언어는 그 단체가 여하한지 잴 수 있는 잣대이기도 하다.

교회가 왜곡된 언어나 케케묵은 말을 그냥사용하면 그 전체에 곰팡이 냄새가 난다.

주보를 보라. 곳곳에 쓰여진 단어들을 살펴보라. 표지나 예배 순서나 광고 등에….

또 교회당 내부의 표지판, 입구 간판들을 보라. 대번에 그 교회의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주보에는 담임목사를 당회장이라 크게 박고 있고, 예배실에 들어가면 앞에 당회원석이라는 별도의 좌석에 표지판이 붙어 있다.

이 정도면 일단 그 교회 분위기를 대충  파악할 수 있다.

1년 52주 외국인은 오지도 않는데, 영어로 예배 순서를 촘촘히 박아 넣는 것도 이상하다.


▲ 목회자의 영향= 교회 용어는 담임목사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특히 기도자들의 용어 속에서 볼 수 있다.

오래 전에 부산의 한 교회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다.

목사님이 예배 시작 기원을 드리는데 소원합니다는 말을 모든 말의 어미로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잠시 후 대표로 나와서 기도하는 집사님도 또 같이 소원합니다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어느 교회는 꼬박 꼬박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했다.

통상 그냥  감사합니다라는 것이 더욱 편안하지 않은가?

전에 신학교에서 대학원 원보를 만든 적이 있다. 2면 상단 좌측에는 강단코너가 있었다.

현장 목회하는 목사님들의 설교문을 게재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설교 원고를 받아서 읽어보면 말이 안 되는 글들이 참으로 많았다.

어가 무엇인지 목적어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 현 번역 성경의 영향= 우리가 쓰는 성경은 1세기 전의 작품이다.

따라서 시대적 변천에 따라 오역이나 부적절한 용어들이 많다. 복음서를 읽을 때 마다 걸리는 부분이 있다.

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마 15:30)

그 정도는 덜하다.

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눅 14:13)

우리 교회 안에만 해도 다리 장애를 가진 사람이 안수집사 가운데만 해도 두 사람이나 된다.

절뚝발이와 불구자라고는 도저히 읽을 수 없었다.

우리 교회 안에 어린이로부터 어른까지 각양 장애인들이 있지 않은가?


▲ 샤마니즘의 영향= 미신에 굿을 보고 나중에 떡을 나누어 먹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다는 말이 나왔다. 사람들은 보통  예배를 본다고 한다.

이는 신학적 문제도 있는 용어인데도 그냥 사용된다.


▲ 무관심의 말= 아무 생각 없이 쓰는 용어들이 있다.

불신자라는 말, 나도 자주 써왔다. 그러면서도 느낌상 별로 안 좋았다.

이 말 예수 안 믿는 사람이 들으면 어떨까? 그러면서도 그냥 지내 왔는바,비신자는 좋은 대안이다.

끝으로 기억할 일이 있다. 교회는 교회만의 고유한 문화가 있다.

교회 안에서 오래 생활해 온 사람은 잘 느끼지 못한다.

교회 문화도 뜻밖에 그 담이 높다. 생전 처음 교회 나오는 사람을 생각해보라!

모든 게 생소하다. 남녀가 섞여 그냥 앉는 거부터, 기도할 때 눈을 감는 일, 아멘,할렐루야 등을 맘대로 쓰는 일,

서로 ○○집사님 하며 부르는 일….

우리는 문턱을 낮추는 작업을 해야 한다.

비신자들이 접하기에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와 생소하지 않은 용어들을 계발해야 한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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